방황하는 검은 새

방황하는 검은 새

이상규(시인)

용산 미군 기지촌에서 배설한 엄청난 독극물 포름알데히드에 관한 문제, 대구 미군기지 부근 초등학생 미군 성폭행 문제 등 미국인들의 한국 내에서의 저질은 비민주적 인권문제가 부각됨으로 인해 눈에 보이지 않게 한국과 미국의 외교 관계자들은 상당히 심각한 국면에 빠진 적이 있다. 한강에 배출한 독극물 문제는 단순한 환경차원의 문제만이 결코 아니다.

미국은 인권을 존중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전 세계에 많은 생명과 금력을 제공하는 입장이라 더욱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매향리 폭격연습장 문제와 함께 SOFA 개정 등을 주장하는 한국민들의 반미의식이 확산될 수 있는 예민한 뇌관이라는 점에서 특히 미국 측에서는 매우 불쾌하면서도 적극 대응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 것같다.

몇 해전만 하더라도 한국 내에 많은 정치인이나 지식인들이 이러한 미국의 태처에 대해 불평 한 마디도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매우 불경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 생각했으며, 나아가서는 반미주의자 또는 국보법에 저촉하였기 때문에 그 동안 미국은 이러한 문제에 안심하고 그저 안일하게만 생각해 왔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최근 남북간의 정상 외교를 통한 남북 간의 연대의식이 공론화 될 시점에 한미간에 그리 반갑지 않은 불쾌한 일들이 자꾸 생겨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역사적 귀결인지도 모른다. 심지어 남북정상회담이 끝나자 불이 나게 미 국방장관이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 김정일과 차 중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라고 종용을 했다는 이야기들이 시중에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지 않는가?

한국전쟁 이후 개발지원 및 무상원조와 강냉이죽을 담보조건으로 하여 냉전의 교두보의 발판이 되었던 한국민들이 어느새 이렇게 민주화되고 의식이 성장했는지, 미국에 대해 사사건건 비인권적인 문제나 비민주적인 미국의 대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현 상황을 미국은 어떻게 해석하거나 인식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아직까지 한국에 대해 힘을 바탕으로 한 냉소적인 대처를 한다면 얻는 것보다는 잃어버릴 것이 훨씬 더 클 것이라는 점은 세계사의 흐름을 되돌아 볼 때 명백한 귀결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미국은 우리나라에 민주주의의 씨를 뿌려주었으며, 제도적인 자본주의를 심어준 우방이다. 그러나 앞으로 그들의 대한 정책이 비민주적이거나 비인권적인 요소가 있을 경우, 한국의 지식인이나 진보적 학생들에 의해 미국의 대한 정책에 훨씬 더 많은 제동이 걸리거나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질 것은 뻔한 이치이다.

최근 일본과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작가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라는 소설의 주인공이 방황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육체는 미국 문화에 중독 되어 있으면서 의식은 이를 거부하며 방황하는 인물을 그려내고 있다. 오끼나와 미군기지 주위의 일본 젊은이들이나 이태원 부근을 방황하는 이들이 바로 그들의 분신이다.

이 소설에서는 냉전 이데올로기에 선물로 물려받은 산업자본주의의 외래문화에 찌들고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어 자신의 내면과 싸우다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파멸하는 자본주의 일본 젊은이들의 모습을 마치 사진을 찍듯 냉정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소설에서 상징적으로 처리된 ‘검은 새’는 미군기지나 당시 마약이나 히피문화를 유입시켜 젊은이들의 심신을 파괴한 미국, 또는 미국식 현대문화를 상징하는 것이다. 즉, 지구상에 미국문화를 정점으로 올려놓은 ‘병든 선진문화’를 비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2차세계 대전 전쟁 빚을 갚기 위해 오끼나와 기지를 내주었던 일본에서도 이제 미국의 비인권적 처사에 대해 본격적인 저항이 우니 나라와 비슷하게 때맞추어 일어나고 있는 일을 간과해서 될 일이 결코 아닐 것이다.
작가 무라카미 류는 미국문화라는 거대한 ‘검은 새’에 보호를 받으며, 경제적 풍요를 누리다가 결국 ‘검은 새’에게 정신까지 빼앗겨 언제 살해당할지 모르는 입장에 처해있는 일본 현실을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병든 선진문화’와 그 대표인 미국문화를 ‘검은 새’로 표현하면서, 인간 해방과 인간이 있어야 할 모습으로서의 회귀를 조용한 톤으로 이렇게 호소하고 있다.  

“릴리, 저게 새야. 잘 봐, 저 도시가 새야. 저건 도시가 아니야. 저 도시에는 사람 따위는 살고 있지 않아. 저건 새야. 그걸 모르겠어? 사막에서 미사일이 폭발하라고 외친 사내는 새를 죽이려고 했던 거야. 새를 죽이지 않으면 나는 내 일을 이해할 수가 없어. 새가 방해하고 있어. 내가 보려고 하고 있는 것을 나에게 감추고 있어. 나는 새를 죽이겠어, 릴리. 새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음을 당해. 릴리, 어디 있는 거야? 같이 새를 죽여 줘. 릴리,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릴리,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단 말이야.” 류는 자신의 반쪽 릴리에게 이렇게 혼돈스럽게 말한다.

미국 문화에 매몰된 자신을 발견하였지만 결코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류의 모습은 꼭 이 나라의 나약한 지식인이나 문화적 식민지 예속화를 즐기는 인사들의 모습과 흡사하다.

남북장관급 회담에서 경인선 철도가 연결된다는 소식이나 8.15 공동축제 개최 등의 소식이 아직 그렇게 반갑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 문제를 우리 스스로 해결하면 되는데 왜 주변 4개 강대국에게 윤허를 받아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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