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삶에서 느끼는 깊은 혼. – 류연창 목사와의 만남.

곤혹스러운 첫 만남, 이내 느낀 훈훈함.

류연창 목사님을 아는 사람은 지역에서도 많지 않다. 이미, 민주화 운동의 일선에서 물러나서이기도 하지만, 목사라는 성직자의 신분이 대중에게 일정한 거리를 요구한다. 사실 나도 류연창 목사님의 이야기를 한은영 간사에게 처음 들어본지라 무척 망설여지는 만남이었다.

1928년 생으로 올해 77세의 나이, 봉산교회 원로 목사이고, 70년 반유신 운동으로부터 지금까지 민주화 운동에 전념해 오신 분이다. 속인이 느끼는 재미가 틀림없지만, 은퇴목사로서 돈 만지는 ‘서대구신협 이사장’이라는 경제적 직분도 내 호기심를 충동질했다. 그러나, 결국 목사님을 만나는 날 까지도 난 인터뷰의 컨셉을 잡지 못하고 말았다.

도대체 무엇을 물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것이다. 편집부의 요청은  5.18 광주항쟁에 대한 증언이었다. 광주항쟁의 중심 도청에서 아드님을 잃은 목사님의 입을 통해, 참여연대의 회원들에게 광주항쟁의 진상과 의미를 전달하고자 함이 분명했다. 나로서는 목사님의 아물어 가는 상처를 다시 건드려야만 하는 곤혹스러운 만남이었다. 단언하건대, 이미 우리는 80년 5월과 광주를 잊어버렸다. 그것은 역사의 뒤안길, 박제된 활자의  일부분으로 존재할 뿐이다. 남몰래 숨어서 광주항쟁 비디오를 보며, 터져 나오던 울음을 꺼꺽 참아야 했던 내 청춘의 진실은 없다. 그러나,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80년 광주가 아닌 가슴에 아들을 묻었다.

80년 5월 광주에 대한 이야기를 선 뜻 꺼내지 못하다가, 먼저 상황에 대해 먼저 물었다.
“당시 계엄군은 환각상태에 있었어요. 3인 1조로 구성된 계엄군들은 민간인에게는 일체 접근조차 안 하다가 목사인 나와는 말을 했어요. 그놈들 이야기로는 3일 동안 잠도 못 자고, 환각제까지 타서 먹었다고 했어요. 그냥 봐도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1인당 5명씩 사람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더군요. 그때 아마 광주에서 2000명 이상이 죽었다고 생각을 해요.”

그러면서 목사님은 부끄러운 고백이라면서 말을 이었다. 광주가 고립이 되어, 식량이 부족할 것으로 생각되어 쌀 한 가마니를 사려고 했단다. 그런데, 그 주인 아저씨가 “같이 삽시다. 한말만 가져가세요”라고 할 때 자신이 목사라는 것이 너무 부끄러웠다고 한다. 당시 광주는 상인들이 채소를 공짜로 나누어주었을 만큼 평화로운 상태였다고 한다.

“교회 근처에서 헌혈을 받고 있었는데, 이 헌혈 차량에 교인은 한 사람도 없고, 근처 업소의 창녀들만이 헌혈을 하고 있더라고요. 이걸 보고 도대체 ‘누가 예수의 제자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라고 말하며, 이 계기가 지금도 민중에 대한 끝없는 믿음의 근거가 되고 있다고 한다.

이야기가 한참 진행되는 도중에 불쑥 “아드님이 도청에서 전사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왜 말리시지 않았는지요?”라고 물었다. 목사님은 이제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그만하고 싶다고 하셨다. 광주에서 대구로 오신 이유도 죽은 아들의 친구들이 집으로 찾아와서 아들 생각이 계속 나서 도망 오다시피 왔다고 한다.

“왜 말리지 않았겠습니까? 계엄군이 들어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들을 집으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저녁을 먹고 나서 아들이 다시 도청으로 가겠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집사람과 제가 한참이나 말렸지요. 그런데 아들놈이 ‘아버지 마저  소신을 버리시면 안됩니다. 죽음으로 가는 길이 맞지만 절대로 말려서는 안됩니다’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예배시간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야기하면서 “죽어야 산다. 정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누군가는 죽어야 진실이 오고, 자유가 온다. 그때야말로 새 생명으로 부활한다” 라고 했습니다. “아들이 신학생이었는데 성직자는 ‘설교와 행동이 일치’해야 한다고 저한테 꾸짖은 것이지요. 차마 이 말을 듣고는 아들을 말리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저와 아들이 마지막으로 본 것이지요” 목사님은 말씀하시는 도중에도 몇 번이나 아들 이야기는 그만 하고 싶다고 반복하셨다. 마지막이라면서 목사님은 “저는 아들을 광주가 아닌 역사 속에 마음속에 묻었습니다. 아들이 광주를 버리지 말라고, 역사를 버리지 말라고 아직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라며 말문을 닫으셨다.

“당신이 대신 설교하실 랍니까?” – 목회자로서의 일상과 운동적 삶.

목사님은 광주에서 말문이 막혀버리고, 나 또한 광주 이야기를 계속 물을 수는 없었다. 갑자기 진보적인 목사와 보수적인 교인들이 만났을 때 부딪히는 문제가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대구의 기독교단은 보수적이기로 유명하지 않는가? 민주화 운동도 운동이지만 목사님의 목회 생활이 궁금했다. 목사님 정도면 빨갱이 목사라고 욕도 많이 들었을 것이고, 당회에서나 교인들의 반대도 만만찮았을 것 같다.  

“목사님, 민주화 운동하시던 목사님들이 교인들의 반대로 목회 활동에 상당히 지장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목회 활동 중에 어려운 일들이 없었나요?”

목사님은 한참이나 소리내어 웃으시더니 “왜 없었겠어요”라며 말씀을 하셨다.
“그래도 우리 봉산교회는 지식 수준이 상당히 높은 교인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목회 활동에 직접적인 장애는 없었습니다. 설교에 불만을 가지신 분들도 많았지요. 항상 반정부적인 설교를 하니깐 신도간에도 이야기가 많았지요. 그런데 저희 장로님 중에 한 분이 “당신들이 설교 하실랍니까? 목사님 아니면 누가 저런 설교할 수 있습니까? 하고 싶은 말 대신 해주는 목사님에게 감사하세요. 잡혀가도 괜찮으면 당신이 설교하세요”라고 하니깐 그때부터는 조용했어요.”

사실, 목회활동 이외에 어려운 점이 더 많았다고 한다. 항상 대공과 경찰 2명이 교회에 상주를 했으니, 사생활이라고는 없었다고 한다. 목사님은 말씀 도중에 자신의 고난보다는 교인들의 어려움이 더 컸다고 하신다. 자신은 신념이 있어서 하는 일이지만, 교인들은 이유 없이 경찰에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장로님들이 더 괴로웠다고 하시면서 지금도 미안해하신다.

다시 의연함으로 !

목사님을 만나면서 내내 들었던 생각은 ‘의연함’이라는 세글자였다. 80년 5월을, 광주를 난 너무 일찍 잊어버렸다. 일상의 행복과 대중의 눈 높이에 너무 일찍 맞추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한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중요하다. 그렇다고 한사람의 열 걸음이 ‘필요 없음’은 아닐 것인데 말이다. 스무 세살 화원에서 내 친구 말선에게서 편지 한 장을 받았다. “친구야 ! 조국을 위해 받칠 목숨은 있어도, 민중을 위해 바칠 뜨거운 열정은 있어도, 저 강물처럼 흐르는 의연함은 없구나! 처음과 끝이 같은 그 의연함은 없구나!”

나도 목사님처럼 70살 넘어서도 간직할 가치가 남아있을까? 실천의 에너르기를 가지고 있을까? 빛 바랜 사진 속에서 내 과거의 모습을 떠올려보기는 쉬워도, 오늘 거울을 보면서 내일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저 너무 추악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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