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찬, 지식인 상에 부합할 수 있을까-이재성회원

이재성회원이 평화뉴스에 쓴 칼럼입니다. 옮겨 싣습니다.

지식인의 두 얼굴

지난 9월 3일 신임 국무총리로 내정된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이야기로 어수선하다. 그런데 그의 정치적 행보에 대한 기대와 우려는 각 정파의 이해관계와 비례하는 것만도 아닌 것 같다. 모두가 각자의 이익계산에 바쁘다. 어쨌든 그를 두고 말이 많은 것은 그만큼 한국사회에서 정 내정자의 이미지가 일정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증거일 터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그에 대한 평가적 이미지는 대체로 중도개혁, 합리적 보수주의자, 합리적 자유주의자, 중도 성향의 케인주의자 등인데, 필자가 생각하기에, 그를 가장 포괄적으로 표현해 줄 수 있는 개념은 ‘지식인’이 아닐까 싶다. 아직까지 그는 우리사회에서 교수, 학자 그리고 총장으로서 존경을 받는 지식인의 이미지로 대변된다. 속임수가 아니길 바라면서도 뭔가 찜찜하다.

지식인, 일상의 압력과 관습에 거리 둘 수 있어야

‘자신이 수행하는 직업에 따라서가 아니라 활동 방식, 스스로를 인식하는 태도, 자신이 지지하는 가치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면 이때의 지식인은 단지 지적 노동만을 수행하는 직업으로서의 교수와는 엄격하게 구별된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하는 것처럼, 지식인이 된다는 것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의미는 ‘각자의 직업이나 예술 장르라는 지엽적인 문제를 벗어나 진리, 가치 판단, 시대의 미적 가치관이라는 포괄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그럴 때 지식인이 가장 강력하게 옹호하는 가치 중의 하나는 자립과 자율의 삶을 추구하는 능력이다. 적어도 지식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려면 일상생활의 압력과 관습에 의도적으로 거리를 둘 수 있어야 한다. 자율에 대한 지식인의 소망은 사상 혹은 이론이 특정 계획표나 조직의 지시에 따라 만들어질 수 없다는 인식에서 시작된다.

물론 지식인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다. 현실의 문화적 기준과 가치체계를 옹호하는 사람, 기존 체제를 끊임없이 비판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 현실의 사태에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 등. 그럼에도 지식인이 된다는 것은 사회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식인은 이념과 사상을 위해서 살면서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식인이 된다는 것은 창조적인 정신활동에 관여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떠맡는 것이고 정치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저러한 지식인의 이미지로 각인된 정운찬 국무총리 내정자는 지난 3일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마치 오랫동안 준비했던 것처럼 세 가지 답안을 내놓음으로써 자신의 지식인상을 만천하에 공개했다. 첫째, 그는 그동안 학자로서 현 정부를 비판했지만 이명박 대통령과 대화를 해보니 자신과 경제철학이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았고, 둘째, 대운하에는 반대하지만 4대강사업이 친환경적이고 수변 지역을 쾌적한 중소도시로 만드는 것이라면 반대할 이유가 없으며, 셋째, 행정복합도시를 원안대로 추진하기는 어렵지만 비효율적인 부분에 대한 부분적인 수정은 불가피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식의 자본화, 침묵하는 지식인들 틈바구니에서

그리고 곧이어 지난 4일에는 서울대 호암교수회관에서 열린 ‘호랑이 스코필드 동우회’ 창립총회에 앞서 기자들과 만나 “한마디로 나라에 밸런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면서 정부에 가서 밸런스를 취하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이명박 대통령과 생각이 다를 수 있지 않으냐는 기자들의 질문에는 “경쟁을 존중하고 약자를 배려하는 것은 생각이 같다”면서도 “구체적 방안에선 다를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4대강 및 감세·구조조정 등 경제정책에서 이 대통령과 다른 가치를 지향해온 정 내정자가 결정적인 순간에 대통령과 충돌할 것이라는 해석과 ‘대권’을 염두에 둔 그가 ‘정치적 고려’에 따라 제 색깔을 낼 수도 있다는 전망 등으로 분분하다.

그럼에도 현 시점에서 정 내정자의 이런 언행은 결코 이명박 정부의 ‘예스맨’은 되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것처럼 비치기도 하고, 대통령을 돕기는 하되 ‘중도실용’을 내세운 이명박 정부의 ‘꽃놀이패’가 되지 않겠다는 의지로도 읽힌다.

여기까지는 좋다. 지식인이 창조적인 정신활동뿐만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떠맡고 정치적 입장을 취하는 것인 바에야 그의 발언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치자. 지식인들은 한 사회의 발전이 매우 순조로운 시기에도 기존의 체제와 불화하기도 하지만 권력을 장악한 독재세력에 적극적으로 봉사하는 어용 지식인들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어용 지식인들은 대부분 곧바로 이데올로그와 하수인으로 돌변해 지적 작업에서 멀어진다. 한 번 살펴보라! 우리 주변에 늘어선 이데올로그들과 침묵하는 다수의 지식인 떼를.

지적 삶에 대한 시장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지적 삶의 전문화가 증대하며, 미디어의 영향력 증가하고, 자율적 공공 영역이 축소되는 등 여전히 소통을 거부하는 현 정부에서 정 내정자의 지식인으로서의 모습은 과연 어떤 결과를 낳을까? 지식의 자본화 현상과 학문의 자본주의가 심화되는 현 정부에 봉사하는 수많은 이데올로그들과 그들과 부화뇌동하는 침묵하는 다수의 지식인들의 틈바구니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일까?

정운찬, 지식인상에 부합할 수 있을까?

‘소칼의 속임수’로 널리 알려진 소위 ‘과학 전쟁’은 정 내정자의 앞날을 미리 보여주는 사례는 아닐까. 과학 전쟁은 과학지식의 성격과 과학연구의 본질을 두고 인문학자, 자연과학자, 사회과학자 등이 다양한 의견을 개진하면서 벌인 일종의 국제적 학술토론이었다. 이것은 1996년 5월 뉴욕대학의 수리물리학자 앨런 소칼(Alan Sokal)이 ‘소셜 텍스트’라는 학술지에 엉터리 논문을 투고 한 뒤에 ‘링구아 프랑카’라는 다른 인문학 잡지에 자신의 엉터리 논문을 조목조목 해명하는 논문을 실었던 것에서 시작되었다.

소칼의 의도는 단순했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인문학자 및 사회학자들이 과학의 객관적 진리를 무시하고 자신들의 언어로 과학을 이해함으로써 과학을 오해하고 있음을 밝히려고 했다. 한 문화가 될 수 없는 일종의 스노우의 두 문화 문제의 과격한 변주곡이었던 셈이다. 정 내정자가 지금까지 자신의 삶과는 다른 문화를 승인한 것이 어용 지식인상인지 아니면 온전한 지적 삶을 추구하는 지식인상과 부합하는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불통의 현 정부가 ‘국민통합’이라는 한 문화를 외친다고 해서 두 문화가 단박에 한 문화가 되는 것도 아닌 만큼 우려스러운 것은 정 내정자의 불확실한 미래다. 그럼에도 용산참사,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 4대강 사업, 금산분리, 감세정책 등과 같은 꽉 막힌 소통 부재의 영역들에 진정성을 갖고 눈길을 돌릴 때, 그는 두 문화의 화해를 조정하는 조정자로서 우리가 기대하는 지식인상에 부합할 수 있지 않을까. 그의 미덕은 겸손이라고들 하는데, 정말이지 국민 앞에 진심으로 겸손해지길 바란다.

[이재성 칼럼 12] 이재성 /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계명대 교양교육대학 교수.
대구사회연구소 연구실장 ssyi@km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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