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주의에 묶인 민주주의-이재성회원

이재성 운영위원이 평화뉴스에 쓴 칼럼입니다.  옮겨 싣습니다.

실용주의에 묶인 민주주의 위기

[이재성 칼럼] “국가를 기업과 동일시하는 국가관…인간다운 삶의 문법이 필요하다”

20년 전 냉전 체제 종식으로 창출된 ‘자본주의의 세계화’와 ‘전지구의 시장화’는 자본주의 세계 경영전략을 정당화하는 기업 제국주의적 신질서를 요구했고, 그 결과로 다국적 기업과 초국적 기업이 새로운 질서로 보편화되었다. 마침내 ‘작은 국가와 큰 시장’을 지향하는 신자유주의 체제가 탄생한 것이다.

자본주의 세계 체제에 편입된 한국사회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마땅히 시장개방은 불가피한 것이었고 자본주의적 경쟁 역시 당연시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영원할 것만 같던 그 신자유주의의 폭력이 미국발 금융위기로 파산 상황에 봉착했다. 전 세계인을 상대로 공포의 시한폭탄이 되어 되돌아 온 것이다. 마치 돌아온 탕아처럼.

“개발과 성장 이데올로기…공동체의 공공성 파괴하는 ‘실용’으로 변질”

광우병 공포로 시작해서 현재 마치 쓰나미처럼 한국사회의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는 한반도 대운하, 의료민영화, 교육시장화, 공기업 민영화라는 성장과 경쟁의 문법들 역시 자본주의 세계화가 낳은 배설물들이다. 그 배설물들의 배후에서 유일 가치로 작동하는 방식은 바로 다국적 기업과 초국적 기업의 실질적 이윤 창출을 위해 사용되는 ‘개발’과 ‘성장’의 이데올로기이다. 이 이데올로기는 현 단계 한국사회에서 인간의 생명에서 시작해서 사회의 생명, 자연의 생명에 이르기까지 한 공동체의 공공성 파괴를 주도하는 ‘실용’으로 변질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처럼 실용의 동력을 단 개발과 성장의 이데올로기는 현 단계 한국사회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겨야 한다’는 승자독식의 무한경쟁을 추구한다. 실용주의적 접근법으로까지 통용되는 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정언명령은 마침내 자본주의적 시장화의 야만성과 동물성을 승인하는 목적으로 작동한다. 한 국가의 전략적 방향과 내용이 그 같은 야만적이고 동물적인 접근법에 기초하고 있는 이상 그로부터 발생할 가치의 혼란과 전도, 사회규범의 정글화, 비정상성과 비합리성의 확산은 민주주의의 심각한 단절을 불러 올 수밖에 없다. 현재 진행형인 미국 금융자본주의 위기는 너무도 당연한 결과일 뿐이며, 한국사회 역시 그 위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국가와 기업의 등식화…민주주의의 심각한 추락을 예고”

때문에 현 단계 우리사회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실용주의적 가치론에 묶여 동맥경화 현상을 보이는 ‘민주주의의 위기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 될 터이다. 국가는 결코 기업일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마찬가지로 국가의 경영 역시 기업의 경영과는 전적으로 다른 가치 체계이다. 자본주의적 자유 시장 체제에서 기업은 이윤 극대화의 논리와 동기에 지배되는 무한증식의 경쟁 단위일 수 있지만, 국가는 도덕적, 문화적 수월성과 선도성을 갖는, 즉 국가의 주인인 국민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 실현력으로서의 경쟁력을 가져야 하는 단위여야 한다.

만일 국민의 주권을 대리한 자가 국가를 기업과 동일시하는 국가관, 다시 말하면 국가경쟁력을 마치 기업경쟁력과 같은 차원으로 등식화하고 있다면 이는 민주주의의 심각한 추락을 예고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비록 1987년 민주화 운동 이후 제도로서의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는 하지만, 실제 삶의 현장에서 민주주의는 아직도 험난한 여정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이다. 더 많은 정치적 민주주의, 사회적 안정성, 문화적 다양성 그리고 인간다운 삶의 질 회복이 요청되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사회에서 요구되는 더 많은 민주주의는 야만이 아니라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의 실현가능성’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그럼에도 현재 우리사회의 모든 주 관심은 생산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맞춰져 있다. 인간의 착취와 존재의 상품화를 넘어서 모든 생산의 토대가 되어 있는 자연을 전면적으로 파괴함으로써만 생산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믿는 그런 생산양식과 소비양식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양식은 생산을 위해서 생산의 토대를 파괴하는 극단적 비합리성에 기초해 있다. 이는 민주주의의 위기이며, 곧 삶의 위기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자본주의가 낳은 사회적 질병…유토피아 꿈꾸는 인문문화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먼저 급속한 도시화의 부작용, 생활공동체의 파괴,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 등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생산과 효율만을 중시하는 단순한 경제성장보다는 인간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대안적 발전모델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필자도 지속적인 관심을 표하고 있는 지방자치 혹은 더 나아가 주민자치는 주민 스스로 참여와 연대를 통해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한 관심을 증대시키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지방분권을 통한 권력의 분산과 풀뿌리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실현하기 위해 현 시점에서 실질적으로 요청되는 과제들을 검토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작은 노력들이 필요하다. 수직에서 수평으로, 아래에서 위로, 분열에서 협동으로 나아갈 때 민주주의의 지반은 더욱 강고해질 터이다.

둘째,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야만성과 동물성을 순치하고 제거하는 도덕성에 기반하여 인간다운 삶의 문법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 생존 경쟁력만을 유일 가치로 삼는 사회는 사회구성원들 사이에 특수한 정신질환을 일으키고 사회를 통제 불능의 수준으로 파편화한다. 우울증, 정신질환, 자살충동 등은 자본주의적 정신질환이며 범죄, 이기주의, 극단적 개인주의 등은 자본주의가 낳은 사회적 질병이다. 이것들이 초래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공동체 의식과 규범의 소멸, 인간의 황폐화, 사회의 사막화이다.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고, 가장 행복하게 하는 상태에 대한 상상적 투사가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결핍, 공포, 불안, 소외, 억압, 불평등이 만연한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인간이 꿈꾸고 희망하는 유토피아에 대한 인문문화적 상상력이어야 할 것이다.

셋째,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공동체의 회복 없이는 첨단 기술공학 사회로의 진입은 물론 민주주의의 성숙이나 인간의 행복 증진도 불가능하다. 공동체라는 개념은 좌와 우 혹은 진보와 보수라는 이념적 대결을 넘어 인간성의 고양과 사회통합의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실질적 개선을 이루고자 하는 지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공동체라는 개념 자체를 실질적 민주주의 혹은 더 많은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 공동체는 우리사회 내부에 횡행하는 모순과 갈등들을 지적하고 바로 잡을 수 있는 비판적 시민사회의 다른 이름이 될 것이다.

[이재성 칼럼1] 이재성(계명대 교양학부 철학 교수. 대구사회연구소 기획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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